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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학평론]어니스트 헤밍웨이'노인과 바다'-시간의 패총 너머 남아 있는 것은 @이승민


     그 형태가 어떠하든, 모든 생명은 사그라진다. 특히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이란 생명은 '항구적'이란 관형사로 수식할 수 없는 변질적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자신이 걷게 될 노화라는 노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악도(惡道)의 대단원에 서 있는, 노화 된 그들의 모습을 두려워한다. 청명했던 안광은 점멸하고 명민했던 총기는 맥을 다 하며 관절은 부식하여 옅은 충격에도 무너져 내린다. 과거 뭇사람을 매혹한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미색이라 할지라도 시간이란 암막이 이를 덮게 되면 그 누가 이를 알아봐 줄 터인가. 그리고 삶의 문턱에서 벗어나가게 되면 맞이하게 되는 죽음. 이 미지의 것에 대한 누미노제(Numinose) 또한 노화를 두려워 하게 하는 것의 한 요인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중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아직 찾아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심 할 필요 있을까?때문에 본인은, 이에 대한 반론으로써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저서 '노인과 바다'를 노화라는 측면에서 해석해보고자 한다.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마한 돛단배 하나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필생의 운수를 모두 소진시킨 듯, 팔십사 일간 그 무엇도 낚아내지 못 한다. 2달러 50센트 짜리 복권 한 장 살 돈이 없어 이마저도 타인의 힘을 빌어야 하는 빈궁한 처지이나, 그의 꿈 속에선 언연히 힘을 과시했던 젊은날의 초상도, 그보다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도, 오늘날 맞게 된 현실이란 풍랑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유년시절 보았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사자들의 모습만이 그의 꿈이란 화포에 그려진 전부였다. 그의 꿈 속에서의 사자들은 저물어 가는 황혼에서 마치 새끼 고양이와 같이 장난을 친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노인을 대변하는 듯하다. 저물어가는 황혼은 삶의 황혼기를, 새끼 고양이와 같은 사자는 약동하는 생명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경험이란 도료로써 그린 그림엔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개탄은 커녕, 마치 자신을 닮은 사자들과 함께 삶에 대한 의지적 모습이 드러난다.


비록 삶의 황혼기에 있으나, 노익장이란 말을 연상케 하는 노인은 이틀낮밤 동안 신장 5.5m, 체중 700kg의 청새치와 각축을 벌인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연륜과 관록이란게 어떠한 것인지 이의 뜻을 확고히 정립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는 본인이 말하듯, 물고기를 잡기 위한 요령과 기교를 근육으로 기억하고 있다. 근육 자체의 역량은 줄었어도, 이를 지탱해 주는 비가시적 힘이 존재하기에, 산티아고에겐 젊은 어부들이 쓰는 고가의 장비들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운수가 완전히 바닥난 '살라오'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노인을 다시 바다로 내모는 것은 단순히 수십 년 간 누적된 기술에 대한 자신만이 아니다. 그에겐, 젊음의 전유라 여겨지는 불요불굴의 기개가 있다. 화물실이 비어있는 선박은 거친 풍랑을 만나면 필히 뒤집어지듯, 실력이 논외시 되는 채 기백만이 창만하는 젊은이들은 만용만을 일삼으며 자충수를 두길 마련이지만, 일생 동안 수렴 해 온 경력이란 밸러스트(무게추)로 만재 된 노인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방종치 않고 초연의 자세로 어업에 힘쓴다.


노인은 끝내 청새치와의 사투에서 승전하나, 낚싯대를 갈무리하고 흠신 할 새도 없이 청새치가 남긴 혈흔을 따라 상어들이 들이닥친다. 그의 인생 최대의 수확물이 한 점 한 점 뜯어져 나간다. 그러나, 일망의 희망마저 말소 된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노인은 굴하지 않는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만사를 방기하는 대신에 자신이 잡은 청새치가 살아서 상어를 상대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죽을 때 까지 싸우겠다.'라는, 작가가 강조하는 인생관을 드러낸다. 종내에 가서 일전엔 청새치었던 잔해를 보며 그가 느끼는 회한은, 밥벌이를 하지 못함에 대한 분개가 아니라 죽은 청새치에 대한 연민과 유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비록 상어 떼로부터 청새치를 지켜내진 못하였으나, 결말부에 항구에 정박하여 잠자리에 들어 사자꿈을 꾸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그를 상어 떼로부터의 패배자가 아닌 끝까지 자신의 절개를 관철하며 초극의 모습을 보인 영웅적 승리자로 인식하게 된다.


헤밍웨이의 문체는 다분히 간결하고 명료하다. 본 저서의 골자를 관통하는 '노인과 바다'에 대한 약 백 쪽 가량의 서사엔 그 어떤 추상적 수사법도, 거북한 미사여구도 쓰이질 않았다. 마치 매 음절마다 탁... 스타카토가 찍힌 듯 노인과 바다 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에 대한 절제 된 서사엔 어떤 웅장한 감동이 내재되어있다. 궁색한 호소 없이 그저 사실적인 전달만을 전담하는 화법과 바다를 향한 노인의 방백에서 드러나는 리얼리티로부터 본 저서는 생동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화법으로 담담히 이야길 전하는 헤밍웨이는 이렇게 역설하는 듯 하다. 노화란, 결국 퇴적과 다름 아니다. 물론 온몸의 재재소소 산재 한 시간의 패총(貝塚)에 육체는 더뎌지고 무거워 질 수 있으나, 오랜 시간 양분을 머금은 옥토에서 거목이 자라나듯, 시간의 잔흔이야말로 삶의 결실의 필요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