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유혹이란 포말(泡沫)에도 풍화되고, 소슬한 욕구의 미풍에도 함락되는 사상누각과 같은 각오들을, 매일 같이 양산한다. 이러한 사상누각 대신 봉황루와 같은 확고한 각오를 갖기 위해선 일단 ‘자신(自信)’이란 반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의식 저변엔 정신과 육체를 망라한 모든 고통을 기피하고자 하는 자구책이 내재해 있다. 특히 학습되지 않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비롯되는 고통이, 실재하며 일상에 비근한 고통 중 가장 기피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지금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마저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세상만사 중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오랜 시간을 걸쳐 학습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영속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데카르트와 같은 회의주의자라 할지라도,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 말하며 불신으로 창만한 세상 중 자기 스스로에 대한 실존에 대해 의심하진 않는다. 이와 같이, 아무리 다변적 일이 다분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확정적이고 불변의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본인이 세운 각오가 현실로 도출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마저 불신하게 되고, 드넓은 창해 위에 의탁할 데 없는 백구(白鷗)와 같은 처지가 된다. 때문에 앞서 말한 인간 기저의 자구책은 이런 불신의 화살촉을 나 자신이 아닌 본인이 세운 각오에 돌린다. 즉, 처음부터 모래 위에 누각을 지어 무너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기 보다는 외부의 환경과 상황에 칭탁(稱託)하는 것이 인간 군상의 모습이다. 이렇듯, 불신을 하게 되는 실질적 이유는 나 자신이 완벽하다는 ‘맹신(盲信)’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맹신은 뭇사람들의 의지를 교살하는 완벽주의란 모습으로 형상화 되기도 한다. 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완벽주의자들은, ‘어차피 안 될 거..’와 같은 말을 운운하며 미소(微小)한 결함에도 이를 더 큰 노력으로 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완성’과 ‘미완성’, 이 이분법적 사고 하에 그간의 부산물을 모두 부정하거나 미래의 기회들을 모두 방기한다. 이는 스스로 완벽하다는 맹신의 직소퍼즐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퍼즐조각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완성되지 않은 편린(片鱗)들을 수합하여 필경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런 도착적(倒錯的) 완벽주의로는 결국 무엇 하나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
때문에, 확고한 각오를 갖기 위해선 자신과 맹신을 분계(分界)한 운신(運身)을 해야 한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신뢰가 선행되어 자신이 지표로 삼은 등대를 향해 삶의 해무(海霧)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러한 자신이 어그러져 맹신으로 거듭나면 결국 해무에 가려 보여지는 극히 일부의 근경만이 제 삶의 전부인줄 아는 식견이 고루한 정저지와(井底之蛙)가 될 우려가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만이 할 수 있다. 의심하면 의심하지 않은 만큼 밖에 못 하고, 할 수 없다 여기면 할 수 없는 것이다.’ 故 정주영 회장이 말했던 것처럼, 이루고 싶은 바 있다면 이를 향해 증진하라.
본 칼럼은 필자가 자성록에 기술한 내용을 기반으로 총3부작으로 진행 될 예정입니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평론]베르나르 베르베르'인간'-인간이기에 놓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일침 @이승민 (0) | 2013.07.16 |
---|---|
[중국견문록]추야우중, 고국을 노래했던 최치원을 느끼면서 @이승민 (0) | 2013.07.16 |
당신을 옥죄는 나태란 질곡을 끊기 위하여 - (1) 자괴의 극복법, 자애 @이승민 (0) | 2013.07.16 |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 @이준형 (0) | 2013.07.16 |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 @이준형 (0) | 2013.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