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문학으로서의 첩보물은 총격이 난무하는 추격전과 유혈이 낭자함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로 대표되는 007시리즈의 이미지와 크게 상등해왔다. 그리고 여기, 북에서부터 남파되었으나 그의 태반에서부터 연줄이 끊기게 되어 배역으로서의 삶이 배우로서의 삶으로 전치된 고정간첩 김기영이 있다.
그에겐 아내가 있다. 또한 자식도 있다. ‘간첩’이란 약간 위험한 직명 대신 그의 명함엔 ‘영화수입업자’라는 그럴듯한 직명이 적혀있다. 일생의 반을 당과 수령 대신 민족과 국가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체류하며 이제 김기영에게 있어서 남한은 타향이 아닌 고향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400쪽 가량 서사되고 있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은 그의 뇌수를 관통하는 듯한 두통과 함께 졸연히 찾아온다. ‘문어단지여 허무한 꿈을 꾸네 하늘엔 여름달’.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4번 명령. 귀환. 이렇게 그가 항상 현심하던 바는 예고 없이 그의 안일한 삶에 불청객이 되어 나타나고 이 범상치 못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바로 이 책의 본류가 된다.
남쪽에 남느냐, 북으로 향하느냐. 이런 선택의 층위는 본류에 서 있는 기영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내인 장마리는 자신보다 수십살은 어린 애인의 혼숙요청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선다. 또한 기영의 딸인 현미는 자신의 반라사진이 유출되어 크게 상심한 벗과의 우정과 그녀가 몰래 연모한 학우의 생일파티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되며 기영의 옛 벗인 소지현은 기영을 따라 월북하여 작가로서의 역경을 즐길 것인지 남한에 남아 국어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지 선택의 의무를 지게 된다.
이렇게 김기영의 필사적 하루라는 본류와 그의 주변인들의 선택이라는 지류들이 합하여 본 소설인 ‘빛의 제국’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인 ‘빛의 제국’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가?
먼저 이 빛의 제국이라는 표현의 이해를 위해선 작가가 표지에 제시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인 ‘빛의 제국’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이 그림은 일출 직후 청명한 하늘과 일몰 직후 이슥한 밤거리의 모습을 초현실적으로 대위시켜 유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세가지 현상세계인 어린 시절의 기영이 존재하는 70년대 북한과 기영의 남파 직후 사회주의운동의 바람이 불 때인 80년대 남한, 그리고 부와 여유가 범람하여 개인의 도착적 선택이 비근하게 된 현대의 남한. 이 모두 작가가 얘기하는 ‘빛의 제국’이다.
먼저 어린 기영의 세계였던 70년대의 북한은 이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민들을 무균의 공간에 병치시킨 ‘빛의 제국’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공간에서도 기영의 어머니는 편집증에 시달리다 이 고통스런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열쇠로서의 비수를 자신의 팔목에 깊이 삽입한다. 또한 남파 직후 대학생으로 신분이 위장된 기영의 세계였으며 5.17 쿠데타 이후 전두환 집권 당시인 80년대 남한 또한 민주화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 젊은 지식인들의 자정운동으로 ‘빛의 제국’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들도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갖고 학생운동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며 암약한 모습을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도태와 도착의 시기인 현대의 남한은 그 이전의 어떠한 빛의 제국보다 더 강렬한 빛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빛의 강렬함은 곧 사회구성원들의 음영의 짙어짐을 뜻한다. 이는 결말에서 스포트라이트가 기영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기영이 모습이 마치 유령과 같았다는 표현에서 더욱 절실히 드러난다. 그는 선택을 하지만 이는 그의 주체성이 결여된 타의에 불과하기에 현대남한이라는 부유하고 풍족하다 여겨지는 사회상에서 그는 이 빛의 제국 이면의 어둠에 잠식되어 형(形)만이 존재하는 유령으로 잔류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모두 빛의 제국에 살고 있다. 그러나 거리엔 바로 이 강렬한 섬광을 항상 마주하듯 찌푸린 얼굴들만이 존재한다. 과연 이러한 제국의 빛은 누구를 위한 빛인가? 조명인가? 일광인가? 아마 이에 대한 답이 김영하 작가가 본 소설에서 강조하고 싶은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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