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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실패의 예방 주사, 셀프 핸디캐핑 @차지훈

(하루에도 몇 번 씩 우리는 자기주도적 예방주사를 놓는다)


주사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어른이라도 주사를 맞으러 갈 때는 뭐 씹은 표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주사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맞는다. 그것도 스스로 알아서 말이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주사중독남 고등학생 다민이의 하루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오늘은 다민이의 기말고사 마지막날. 공부를 하다보니 시계바늘은 어느덧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다민은 잠자리에 들며 생각한다.
'지금 자면 3시간도 못 자서 아침에 늦게 일어날 것 같은데. 아 큰일났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5시 30분.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일까, 2시간 조금 더 잤을 뿐인데 전혀 졸리지 않다. 상쾌한 기분으로 학교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시험 당일의 교실 풍경은 서늘하다. 시뻘건 눈으로 다민은 지운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 공부 많이 했어?"
"아 나 어제 완전 놀아서 공부 하나도 못 했어. 시험 망함ㅠ"
"나도ㅠ 요즘에 너무 놀아서 시험범위 어딘지도 몰라... 어제도 새벽까지 게임했음..."
인사가 끝나자마자 지운은 반쯤 풀린 눈으로 다시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수학 시험이 시작되고, 다민과 지운은 20분만에 검토까지 끝내고 잠을 청한다.

시험이 끝나고 다민과 지운은 친구들과 PC방에 간다.
"다민! 나랑 이 게임 같이 하자!"
"아 나 이거 한 번밖에 안 해봐서 잘 못하는데..."
"괜찮아, 내가 알려줄게!"
게임이 시작되고, 다민의 마우스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다민, 너 이 게임 잘 안 해봤다며, 완전 잘하는데?"
"운이 좋았어...ㅎㅎ;"
"근데 니 아이디가 왜 랭킹 3위에 써져 있어?"

뒤이어 다민과 친구들은 노래방과 운동장에 갔다.
"아... 노래도 못 하고 축구는 안 해본지 몇 년 되서 둘 다 자신없는데..."
다민은 풀죽은 목소리로 마이크와 축구공을 잡았다.
친구들은 그 곳에서 박효신과 메시를 보았다.
다민은 하루에 주사를 4대나 놓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평소에 많이 하는 말들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을 때, 혹은 변명할 거리가 필요할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이런 말들을 한다.
이러한  변명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대치를 낮추고,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하여 일에 실패했을 때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셀프 핸디캐핑은 자신을 옭아맨다)


위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다민은 공부를 밤늦게까지 했음에도 친구에게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신은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시험을 잘 봤을 때는 시험이 쉽다거나 운이 좋았던 것이고, 시험을 못 봤을 때는 공부를 안 했다는 변명이 있어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밑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다민은 실제로 축구, 게임, 노래에 모두 소질이 있지만 거짓말을 하여 자신을 불리한 상태에 놓고 상대방의 기대치를 낮췄다. 그렇게 되면 실수로 공을 못 차도, 음이탈이 나도, 게임에서 져도 당연한 결과가 되므로 안심이다. 어떤 일에 성공하던 실패하던 자신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핑계, 즉 스스로를 불리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을 <셀프 핸디캐핑> 또는 <자기 불구화> 라고 한다. 다음은 셀프 핸디캐핑에 관한 유명한 실험을 소개한다.

(셜록?)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버글래스와 존스는 '학습능력과 약물 효과' 라는 주제로 실험을 했다.
지원자들을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눈 뒤, 각각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다.
시험이 끝나고 두 그룹 모두에게 실제 결과는 알려주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하며, 두 가지 약을 제시한다.
첫 번째 약은 집중도와 두뇌 회전 속도를 향상시켜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주고,
두 번째 약은 반대로 집중도를 낮춰 문제 푸는데 어려움을 준다.
지원자는 두 가지 약 중 하나를 선택하여 먹은 뒤, 다음 시험을 보게 된다.

상식적으로 두 그룹 모두 첫 번째 약을 선택할 것 같지만, 결과는 달랐다.
쉬운 문제를 푼 A 그룹은 다음 시험도 쉬운 문제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 첫 번째 약을 골랐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푼 B 그룹은 다음 시험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두 번째 약을 선택해서 자신을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약을 먹으면 집중도가 하락한다고 했으므로, 시험 결과가 나쁘면 약 탓을 하면 되는 거고, 시험 결과가 좋게 나오면 '약을 먹었는 데도 불구하고' 잘 본 게 되므로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잃을 게 없어지게 된다.


(적절.)


적절한 소금간은 음식 맛에 있어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소금을 많이 넣으면 본의 아니게 바다의 맛을 느끼게 돼 버린다.
핑계와 변명도 같은 맥락이다. 적당량의 셀프 핸디캐핑은 사회 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자신에게 도움도 되지만,
'과유불급' 이라 했다. 위의 다민이처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잘못하면 자신감을 하락시키고 무기력해질 수 있다. 적절히, 뭐든지 적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