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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마음 속의 악마, 루시퍼 이펙트 下 @차지훈

(감옥에서도 꼬박꼬박 일기를 쓰시는 로버트 씨)


<8월 14일, 토요일>

스탠포드 실험, 일명 감옥 실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죄수 역할로.

실험이 시작되자 교도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의 머리에 스타킹을 씌우고 오른발엔 체인을 채웠다.

또 그들은 우리들을 부를 때 이름 대신 죄수 번호로 불렀다. 내 번호는 2314번이다.

내 이름은 로버트라고, 로버트! 장발장도 아니고 이게 뭔 굴욕인가 싶다.

특히 5401번인가 하는 죄수를 유난히도 괴롭히던데, 괜찮나 모르겠다.

아마 세상에 있는 모든 욕들은 다 들었을 거다.

속옷까지 벗겼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겠지.

아, 아까 교도관놈들이 뿌린 살충제 때문에 눈이 아직도 따끔거린다.

하지만 명심하자, 이건 게임이다. 어디까지나 명문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실시하는 심리 실험이라고.

설마 무슨 일 있겠어?

(죄수가 뿔났다)

 

<8월 15일, 일요일>

 

어제 속옷까지 뺏겨서 화가 잔뜩 난 5401번이 우리를 깨웠다.


말인 즉슨,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교도관들에게 일종의 반란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동의했고, 나 또한 찬성할 수 밖에 없었다.


투표가 끝나자 마자 5401번의 주도로 우리는 감옥 문을 지키던 교도관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낸 뒤 감옥 문을 열고 교도관들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우리는 침실의 불을 켜고 교도관들을 깨웠다. 그러고는 5401번을 비롯한 우리들은 교도관들에게 어제 당했던 것과 같은 짓을 교도관들에게 그대로 했다.


머리에 있던 스타킹을 교도관 머리에 씌우고, 몸 구석구석을 때렸다.


5401번은 흥이 나서 자신의 속옷을 벗겼던 교도관에게 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했다.


나머지 교도관들이 화가 나서 쫓아왔을 때는, 쇠창살을 닫고 간이침대로 바리케이트처럼 못 들어오게 막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복수혈전이 있고서야 우리는 다시금 단잠에 들었다.


하지만 다시 잠에서 깼을 때, 교도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가 돼 있었다.


학대의 수위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소화기를 뿌리고, 침을 뱉고, 엎드려 개처럼 걷게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군대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간미연이 부릅니다, 미쳐가)

 

<8월 16일, 월요일>

 

8612번의 상태가 이상하다. 

 

5분 간격으로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고 있다.

 

가끔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치고 욕설을 내뱉는다.

 

분명히 지원 조건 중에 정신 병력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증세가 심해지자 지켜보고 있던, 실험을 주최한 남자가 결국 그를 실험에서 제외시켰다.

 

실험 중단자가 생기자 교도관들은 우리들을 더 심하게 학대했다.

 

그들은 우리를 인간처럼 대하지 않는다.


점점 나도 미쳐가는 것 같다.

(실제 스탠포드 감옥 실험 장면)

 

 <8월 18일, 수요일> 

 

이 곳은 미쳤다.


어제는 밤새 학대를 당한 나머지 일기를 쓸 시간도 없었다.


가끔씩 실험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내 이름, 뭐였지? 아 그래 로버트. 난 로버트다. 2314번 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오늘 아침엔 819번 죄수가 울먹이며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교도관들은 우리한테 '819번은 나쁜 죄수다' 라고 복창하게 했다.


어느새 그들의 말들을 고분고분 듣게 되어 시키는 대로 했다.


819번은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연구자의 급박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우리는 이것이 실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은 상처투성이에, 요 며칠 간 살충제, 소화기 분말, 가래침, 변기물 등등 끔찍한 것들을 먹어 왔다.


이제 그만.


돈이고 뭐고 필요없으니까 여기서 당장 나가고 싶다.


난 지금 미쳤다. 앞으로도 계속 미쳐갈 것이다. 

원래 2주로 계획되어 있었던 실험은 단 5일 만에 중단됐다. 물론 로버트라는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일기장을 통해 그 당시 참가자들의 상황과 특히 죄수들의 속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실험 결과 발표 당시에는 사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여러 변인들이 통제가 안 된 상태였고, 가설도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은 그렇게 묻히는 듯 했다.

 

(단지 실험에 불과하다고?)

 

2004년, 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머리에 봉투를 뒤집어 씌우고, 옷을 벗기고, 몸에 욕설을 써 놓았다. 아부 그라입(Abu Ghraib)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이 일은 마치 40년 전 스탠포드를 보는 듯 하다.

실험을 계획했던 필립 짐바르도는 실험 홈페이지에 이 사진들을 올려놓았다. 마치 일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이.

세상은 그를 다시금 주목하기 시작했다. '인류 최악의 실험 Top 10' 안에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그 실험 결과가 현실로 드러났으니,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짐바르도는 자신의 실험과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을 연관지어, '사람은 주어진 상황과 역할에 따라 악마가 될 수 있다.' 라는 이론, 이른바 <루시퍼 이펙트> 를 발표했다.

스탠포드에서는 '교도관과 죄수' 라는 역할과 '감옥'이라는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실험이라는 사실을 잊고 실제 상황인 듯이 역할과 상황에 몰입하게 했다.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에서는 '승전국 병사' 와 '패전국 포로' 라는 역할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라면 안 그럴텐데', '나라면 멀쩡할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황과 역할이 나에게 닥쳤을 때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짐바르도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상황에 의해 지배당하는 동물입니다. 본성적으로 악한 것이 아닌, 상황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죠. 저라고 다를 것 없습니다. 저 또한 실험 당시에 어느새 교도관이 되어 죄수들을 방안에 가두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