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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상상력의 씨앗, 거짓 기억 @차지훈

당신은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을 기억하는가?

그보다 더 오래 전인 유치원에 입학하던 때는 어떤가?
아니면 걸음마를 시작하던 무렵을 기억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물론 어렴풋한 장면으로 기억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흐릿한 기억을 근거로 당신이 과연 어린 시절을 '진짜' 살았는지에 대해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고, 그리고는 자신의 어렸을 적 사진들이 가득한 앨범을 보여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정말 만약에 그 사진들조차 누군가가 조작해서 마치 자신을 찍은 사진인 마냥 여태껏 속여온 것이라면? 그래도 당신은 어린 시절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는 우주 저 편 너머에 있는 별에서 태어나 지구로 떨어져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모두 조작된 것임에 불과하다면?

여기까지 말하면 훌륭한 소설가라는 칭찬과 함께 주먹이 날아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짜로 우주에서 아기를 만들어 지구로 전송하는 기계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조작되었을지도모른다는 것이다.

미국 어빈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로프터스 박사는 기억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로프터스 박사는 대학생들에게 '벅스 버니' 캐릭터를 선전하는 광고를 보여준 뒤, 어렸을 적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들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실제로 벅스 버니와 디즈니랜드와는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디즈니랜드 캐릭터에 맞서 대적할 만한 캐릭터로 꼽히는 일종의 반(反) 디즈니 캐릭터라고 해도 무방하다. 고로 디즈니랜드에 벅스 버니가 있을리 만무.
하지만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벅스 버니 광고를 보여준 집단의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 마스코트와 악수를 했다던가, 같이 사진을 찍었다던가, 벅스 버니 캐릭터 상품을 산 적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36%의 사람이 디즈니랜드에서의 행복했던 벅스 버니와의 경험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셉션도 일종의 거짓 기억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성폭행 사례에 대해 예를 들었다.

1993년, 레이먼즈 수자와 셜리 수자 부부는 딸과 손녀에 대한 성폭행, 성추행, 구타 혐의로 피소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혐의를 증명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피해자 입장인 딸의 증언만으로 유죄가 성립되었다.
로프터스 교수는 피해자와 가해자 중 피해자의 의견만 수렴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가해자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판단한 결과, 가해자라고 생각된 부부는 사실 성폭행 및 구타 행각을 벌인 적이 없었다고 밝혀졌고, 곧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알고 보니, 딸인 셜리 앤은 자신의 부모가 아닌 20대의 두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고 심리치료를 받던 나날, 부모님에게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고, 그것이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다시금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는 깨달음을 주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을 계속 꾸게 되는데다, 4살짜리 조카가 밤마다 무서운 꿈을 꾼다는 소리를 듣고 조카마저 부모님의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KBS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엄마와 딸이 놀이동산에 놀러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재밌게 놀고 있는 와중에,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 어렸을 적에 엄마랑 놀이동산 같이 갔었는데, 거기서 길 잃어버려서 엄마가 찾았던 거 기억나?'

당연히 그런 적은 없었다.
딸도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의 씨앗은 점점 자라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일주일 쯤 뒤 다시 그 모녀의 집을 찾은 제작진은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 했다.
딸은 엄마의 한 마디, 즉 더 어렸을 적에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이 덧입혀지고 커지면서, 마침내 진짜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던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일기장에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놀이동산 직원이 자신을 미아보호소까지 데려다 주어서 엄마와 만날 수 있었다' 는 등의 상세한 기억까지 만들어 내서 진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경험과 생각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벅스 버니 광고, 별 생각없이 내뱉은 몇 마디의 말, 혹은 특정 내용의 사소한 꿈과 같이 아주 간단한 암시만으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마치 진짜 경험했던 것처럼 기억하는 것들. 이것을 <거짓 기억> 혹은 <허위 기억>이라 한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는 영화 '인셉션' 이 있을 수 있겠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거대 회사의 차기 회장에게 꿈 속에서 아주 간단한 암시(생각)를 심어줌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 기억 등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거짓 기억은 그 특성상 악용될 여지가 있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사람을 살해한 후에 자기 자신에게

'내가 다리에서 그를 밀어넘어뜨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살하려던 것을 내가 지나가다 우연찮게 본 거야'

와 같은 암시를 걸어 말그대로 '나조차도 모르게' 죄책감 없이 범죄 행각을 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긴 친구에게

'너 어젯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제 경찰차 오고 난리도 아니었어!'

라고 간단한 암시만 던져줘도 친구는 있지도 않았던 어젯밤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상상하여 지어낼 것이다.
친구가 자진해서 경찰서에서 경위서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는 어젯밤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잘 잤는걸.

인간의 상상력은 때로 독이 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