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학교를 다니며 외부활동을 하는 고교생이 늘었다. 청소년 단체 혹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기획해 진행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자신 나름의 이유와 의지를 가지고 활동에 임한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하는 고교생들을 바라보는 고교생 부모님들의 시선은 대부분 곱지 않다. 그 이유는 왜일까? 일단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학업 외의 것에 신경을 쓰다보니 학업에 지장이 온다는 것이다.
외부활동이나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고교생들은 부모님의 이런 시선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의견은 결국 한 군데로 모아지기 마련이다.
“너는 단지 공부가 하기 싫어서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니냐. 왜 공부라는 문제를 정면돌파하지 않느냐, 너가 하는 것은 도망을 치는 비겁한 짓일 뿐이다.”
고교생이 학교에 있는 시간, 공부를 하는 시간의 사이에서 교과공부 이외의 외부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물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다양한 이유들 가운데 ‘도피처’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피처’로써의 외부활동은 비겁한 짓인가? 나는 ‘도피처’로써 외부활동을 하는 고교생들이 비겁하고 졸렬한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상을 넓혀 문제를 정면돌파하는 방법이 아닌 도피처를 찾아 돌아가는 길을 택한 모든 분들을 변호하고 싶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는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을 묻고 싶다. 왜 도망치는 것이 비겁한가? 도망치는 것은 비겁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영리하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의 예를 가정해보자. 건물에 큰 화재가 발생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곳에 갑과 을이 있다. 갑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건물의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고 을에게 말했다. 불이 가로막고 있는 건물의 입구를 통해 나가면 건물 밖으로 최대한 ‘빨리’ 나갈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을은 불을 뚫고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는 갑에게 비상구를 통해 지하도로 내려가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갑은 그의 말을 듣고선 짧게 중얼거리고는 불이 타오르고 있는 건물의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비겁한 녀석이구만. 문제를 정면돌파하지 못하다니.”
이 상황에서 우리는 갑과 을 중 누가 더 현명하다고 볼 수 있을까?
갑이 죽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을 뚫고 지나가며 분명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도 치유되기 힘든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게’ 문제를 정면돌파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 뿐인 영광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상처 뿐인 승리는 이로울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비겁했더라도, 조금 시간이 더 걸렸을지라도, 상처 입지 않고 비상구를 통해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온 을을 더 현명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평해야 하지 않을까. 비상구를 통해 탈출하는 것과 도피처를 찾아 떠나는 것은 ‘새로운 생각’으로 바라본다면 굉장히 현명한 길이자 선택이다. 문제를 정면돌파 했을 때 얻어질 만한 것이 상처 뿐인 영광인 것 같다면, 모두 잠시 비겁해지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견문록]추야우중, 고국을 노래했던 최치원을 느끼면서 @이승민 (0) | 2013.07.16 |
---|---|
당신을 옥죄는 나태란 질곡을 끊기 위하여 - (2) 자신과 맹신을 분계한 운신 @이승민 (0) | 2013.07.16 |
당신을 옥죄는 나태란 질곡을 끊기 위하여 - (1) 자괴의 극복법, 자애 @이승민 (0) | 2013.07.16 |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 @이준형 (0) | 2013.07.16 |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 @이준형 (0) | 2013.07.16 |